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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편지 한낮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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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1-31 10:26
정충영 교수의 <갈라디아서 2장-3장>
 글쓴이 : 남산편…
조회 : 3,969  

정충영 교수의 <평신도를 위한 갈라디아서 공부> 2장-3장 (개정)

 

제 2장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1-10 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7

11-14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다 10

15-21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11

 

개종한지 14년 후에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로,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일할 것을 합의하고 바울은 할례가 복음에 필수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바울은 또 공식석상에서 바울이 베드로의 잘못을 보고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게 된 경위를 들려주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는 자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선언한다.

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1-10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가까이 하기를 기피하고 있을 때 바나바는 바울이 겪은 일들을 설명하여 그를 받아들이게 하였고(행 9:26-27)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바소에 있던 바울을 데려와 함께 사역하였고(행 11:19-26) 바울과 함께 일차전도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행 13:3-4). 이로 보건데 바나바는 포용력 있는 지도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디도는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헬라인으로서(갈 2:3)바울과 함께 복음 전파에 힘을 썼다(고후 8:23). 사도행전 15장에는 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유대지방에서 온 형제인 율법주의자들이 '너희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교역자인 바울과 바나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주장하며 교회를 어지럽게 했고 다툼과 격한 변론을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에서는 대표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요청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은 변론 후에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며 할례를 받게 하는 등 이방인 교인들이 견디기 어려운 율법의 멍에를 메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과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율법의 멍에를 지지 않게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할례의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난 사항임을 밝히고 있다.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절에서 바울은 그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할례문제 때문에 간 것이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른 것이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할례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인들에게,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역할이 분담되었고 이방인들에게 전할 복음이 확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 높아 인간이 다 알기 어려운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한 일 중의 중요한 것 하나는 그곳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2절에서 '사사로이 한 것'이란 개별적으로 만나 논의했다는 의미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또 사전에 의논하지도 않은 채 공식석상에 불쑥 안건을 내놓는다면 오해나 반감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유력한 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제시하여 혼란과 오해와 헛된 소문으로 인해 반대를 받지 않도록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 결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파송되어 올라갈 때 디도가 함께 동행하였다. 디도는 헬라인이었기 때문에 이방인이다. 디도의 입장으로는 할례를 받을 절호의 기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것은 이방인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이었다. 할례가 현안의 문제가 된 시점이었으므로 바울은 디도를 모델로 하여 할례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증거 한 것이다.

4절에서 바울이 디도를 할례 받게 하지 아니한 것은 거짓형제 때문이라고 밝혔다. '거짓 형제들'이란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모두 한 형제이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거짓된 교리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이 거짓 교리를 가만히 전파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는데 거짓형제들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된 성도들을 율법의 종으로 되돌리고자 하였다. 이들은 마치 출애급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반항하며 우리가 다시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던 반역한 이스라엘과 다름이 없었다. 거짓형제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을 몰래 전함으로써 형제들을 미혹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이었다.

거짓 형제들은 가만히 교인들을 유혹할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도 바울을 비롯한 여러 일군들의 목회를 방해거나 협박하였지만 바울은 그들의 주장이나 공갈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못된 사람들은 남을 공갈하고 협박할 때는 그 사람의 약점이나 과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금전적인 문제나 이성문제, 혹은 고위층의 권력을 이용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이러한 위협들이 아무런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 되라"(빌 3:17, 고전 14:16)고 한 것처럼 그는 흠을 찾을 수 없는 모범적인 하나님의 종이었다. 바울이 거짓복음에 대해 분을 낸 것은 그가 돌보고 있는 교인들을 거짓 복음에서 지키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성도들 가운데 있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6절에서 '유력하다는 이들'이란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유명하다든가 유명하지 않다는 것은 인간적인 기준에 따른 것일뿐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다'는 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추가할 새로운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연구나 사람들의 아이디어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더할 것이 전혀 없었다. 예루살렘의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 역시 동일한 성령의 계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서로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7절에서 '그들'이란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소위 유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나 유력하다는 이들이 전하는 복음이 동일한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복음을 보충하거나 제외할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의 내용을 확인하였고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가를 의논하였을 것이다. 그 방안의 하나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의 유력한 이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울 등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게 된 것이다.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이다. 신약에는 세 명의 야고보가 나온다. 한 명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마 4:2)이며 다른 한 명은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예수의 12제자들에 속한다. 세 번째의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이다(마 13:55). 9절에서 보듯 야고보는 초대교회에서는 기둥처럼 뛰어난 리더이었다. 그 야고보와 베드로(게바) 그리고 요한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된 것과 온갖 핍박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인정하였고 바울과 바나바도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이 전하는 복음과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서로 도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로 합의하고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로, 사도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기로 합의함으로써 역할이 분담되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 일행에게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라는 부탁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을 돌보았음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바울 일행에게 구제에 특별히 힘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바울 일행도 구제에 대해서는 항상 힘쓰고 있었음으로 이 부탁을 흔쾌히 받아드렸다. 바울 일행이 구제에 힘쓰고 있었다는 사실은 글라우디오 때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바나바와 사울이 직접 유대에 있는 장로들에게 부조를 가져간 적이 있고(행 11:29-30) 고린도 교회에 연보를 하라고 부탁 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고후 9:13).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다 11-14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1절의 '게바'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이다. '게바'란 이름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별명으로써 아람어로 '반석'이라는 뜻이다(요 1:41). 안디옥이란 이름을 가진 지역은 신약 에 두 곳이 있다. 그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이고 다른 하나는 수리아 안디옥이 있다. 1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이다. 스데반의 순교 후에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자 교인들은 흩어져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 말씀을 전하였는데 이 때 세워진 교회가 본 절에서 말하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이다. 사도행전 11장에 따르면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이방인인 헬라 사람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였고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하여 세운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이었다.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와 함께 목회를 했다. 이 두 사람으로 인해 교회가 크게 발전하였고 바울과 바나나는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쳐 처음으로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인 게바가 이 교회를 방문하여 실상을 살피는 것이 당연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베드로가 이곳에 방문하여 체류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무명에 가까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지도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를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책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2절은 그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났다고 배웠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바울의 가르침이었고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은 구약 율법과 유대인의 관례법에 젖어 있을 것이라 판단한 그들은 당황하여 식사자리에서 물러났다. 특히 지도자인 게바(베드로)가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가 한 것처럼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외식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여기서 '외식'이란 말은 위선적이란 뜻으로 잘 못을 저지르고도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아직도 보수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예컨대, 이방인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해 말씀을 들려달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그 집에 들어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말했다(행 10:28).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조차도 율법과 그 관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복음에 어긋난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보여준 외식적인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마저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

바울이 이 같은 위선을 그냥 보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복음의 진리는 직면한 상황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됨을 알면서도 베드로가 이를 어겼고 뒤 따라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 심지어 바나바마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에 가담하게 되고 만 것이었다.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이것을 본 바울은 그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말하자면, 초년병에 지나지 않는 바울이 대 선배인 베드로를 책망한 것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는 어떠한 일도 묵인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당신은 유대인이면서도 복음에 따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지요? 그런데도 당신이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외식하다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어요?'하고 책망한 것이다.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유대주의를 버렸기 때문에 율법에 메이지 않고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 당연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 바울은 베드로에게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라고 지적한 것이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유대주의에 속한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인 것처럼 위선적으로 행한 잘못을 지적한 것이었다.

바울은 베드로 사도를 이렇게 책망함으로써 지도자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 복음의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함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바울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15-21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이방인과 같은 죄인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행하면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인이 될 수 없다 고 말한다(롬 3:1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율법을 온전하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사실은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하면서 율법은 우리가 죄를 깨닫도록 해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롬 3:20).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란 구절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다가'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란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죄를 짖게 하겠느냐?'라 묻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하실 분이 전혀 아니란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7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이 구절은 두 가지의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게 되는 줄 알고 율법을 행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잘못이었다면 그 책임이 그리스도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결국 이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되었다 하더라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또 우리가 죄를 지은 경우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참고로 표준새번역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여 주심을 구하다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표준새번역 2:17)'. 다음 구절(18절)이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한다.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여기서 '내가 헐었던 것'이란 율법주의를 버렸다는 의미이고 '다시 세운다'는 것은 버렸던 율법주의를 다시 신봉한다는 뜻이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율법주의를 버리고 복음의 진리를 따른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복음의 진리를 계속 사수해 나갈 것임을 밀하는 것이다. 바울은 허물었던 율법주의를 다시 세워 지켜나간다면 그것은 스스로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의 핵심이 되는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것이다. 이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율법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으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는율법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허물었던 것을 다시 쌓는 죄가 되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 바울은 보다 구체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풀어나간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바울은 거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해 달리셨던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났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한 것임으로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다. 이것을 대속이라 한다. 대속이란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렀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 앞에 새롭게 태어난다. 그래서 새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살기 위해 율법에 대해 죽는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못 박힘은 나의 못 박힘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말하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삶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도 부활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이며 그것은 내가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내 속에 살아 역사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신다. 내 육체는 아직 살아 있지만 나의 삶은 전과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나는 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소욕을 따라 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할 존재가 되었다. 만약에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돌아가신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 없이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큰 고통을 겪으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절을 다음과 같이 쉽게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 나는 율법에 대해 죽어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영적으로는 나도 함께 죽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셔서 나에게 주신 새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전에 나 자신의 욕심을 살아가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선택하여 주신 것을 크신 은혜로 여기며 이를 자랑하여 왔다.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께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유대인들을 예수를 믿는 것은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진리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은혜임을 밝히고 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하셨다. 이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만약 율법으로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제 3장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라

 

1-5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14

6-9 아브라함의 이신득의15

10-14 저주는 율법으로부터 온다16

15-22 율법과 언약 17

23-29 하나님의 아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 대신 율법주의를 따르는 교인들을 향해 어리석은 사람이라 한탄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그리고는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듣고 믿은 까닭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도 하나님을 믿어 의를 얻으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3430년 전에 벌써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율법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밝힌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며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우리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1-5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란 것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다'는 의미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의 감격이 아직 살아지지 않은 상태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친히 본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 전해준 소식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빠진 것을 본 바울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통탄하여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여'하고 나무란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고 나무란다.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몇 가지로 나누어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의 어리석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대속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고 두 번째 어리석음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을 잘 준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듣고 믿었기 때문인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방인들은 율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살지 않았지만 성령을 받았다. 그럼으로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란 것을 보여준다.

3절에서 '마치겠느냐'는 것은 '끝내겠느냐?'는 의미와 함께 '완전하게 되겠느냐'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이 한 것처럼 인간적인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행함으로 완전하게 되겠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제 그 은혜를 버리고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 다. 이것이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게된 세 번째 이유이다.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주후48~500 경에는 스데반의 순교 후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져 갈라디아지역에도 교회를 세웠고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어 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일부 교인들이 율법주의를 받아드림으로써 그들이 그렇게 까지 고난을 당하면서 지켰던 믿음을 버린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바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정말 헛되이 고난을 당했느냐'고 다짐하며 묻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네 번째 어리석음은 고난을 당한 것을 잊어버리고 율법주의를 받아드렸다는 것이다.

5절에서 말하는 '능력을 행하는 것'이란 바로 기적 행함을 의미한다. 교인들 중에는 성령을 받아 능력을 행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었듯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 중에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능력들은 율법을 지켰거나 율법을 준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 것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7-18).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보면서도 율법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다섯 번째 어리석음이다.

아브라함의 이신득의 6-9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6 절에서 '의로 정하셨다'는 것은 '의로 여기셨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B.C. 2091 ∼B.C. 1806)은 모세(B.C. 1527 ∼B.C.1407)를 통해 주어진 율법 훨씬 이전의 사람이므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진리에 의심을 품었는데 이것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범한 여섯 번째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며 믿음으로 사는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율법은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고 이를 선포하셨다. 그것은 율법이 선포되기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이방인인 갈라디아 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민족이 성경에 미리 선포한 복음에 따라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저주는 율법으로부터 온다 10-14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하는 사람은 모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왜냐하면 신명기에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신 27: 26). 율법을 항상 행한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내어 율법을 지킨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생 동안 율법을 잘 지켰다 하더라도 죽기까지 기다려 보아야 비로소 그가 율법을 다 지켰는지 알 수 있다. 율법을 단한번이라도 범한다면 그는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리석다 한 일곱 번째 이유이다. 율법을 항상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인간을 의롭게 하신다. 그 다른 길이란 믿음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은 하박국(2:4)에서 인용된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의롭게 되고 의롭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과 믿음은 그 뿌리가 전혀 다르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한 아버지에서 났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난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스마엘은 육신의 욕구에 따라 태어난 자녀이다 (롬 9:8). 믿음은 약속에 따른 것이며 율법은 육신에 따른 것이므로 이 둘은 그 뿌리가 다르다. 그르므로 율법을 통해 믿음에 이를 수 없고 따라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에서 살다가 율법의 저주 아래 죽는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들 또한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율법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통해 무엇이 죄인가를 알 수 있다. 그 율법에 비추어 보면 이방인도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한다(신 21;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구속 , 대속 혹은 속량이라 부른다. 대속, 구속 혹은 속량이란 내가 치러야 할 죄 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치렀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율법과 관계가 없게 되었다. '속량' 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엑세고라센'인데 이것은 노예나 죄인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대신 값을 지불한다는 의미이며, 구속(redeem)이란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구분 없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4절에서 '성령의 약속'이란 성도들은 성령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Counselor)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 16:7)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보혜사란 성령을 지칭하는 어휘로서(요 14:16, 14:26, 15:26, 16:7)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도록 곁에 부름 받은 자를 가리키는데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친구 등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인 우리에게 미치게 되고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시겠다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낼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하셨다. 성령이 임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지만 이 행전은 동시에 성령행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과 언약 15-22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바울은 일상적인 예를 들어 율법과 언약의 관계를 설명한다. 합리적으로 성립된 언약은 쌍방의 합의 없이는 그 언약에 아무런 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듯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은 율법이나 다른 그 어떠한 것으로도 폐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언약도 폐할 수 없는데 어찌 하나님의 언약을 폐할 수 있을 것인가!

16절의 '이 약속들'이란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까지 미치며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말한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창 22:18)이며,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 것'이다(창12:3). 여기에서 '씨'란 자손을 의미하는데 '네 씨'가 복수인 씨들(seeds)'이 아니라 단수인 '네 씨(단수: seed)'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킨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아브라함의 많은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네 씨인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울은 구약의 성경구절인 '또 네 씨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에서 씨를 단수로 사용했느냐 아니면 복수로 사용했느냐 하는 것까지 따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한 점 한 획이라도 틀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들은 바뀔 수 없는 것이며 그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졌지만 그것이 그 이전에 이루어진 언약을 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430년이란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때로부터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까지의 기간이다(출 12:40-41). 바울이 의도한 바는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업은 모세의 율법이 이전에 하신 언약을 따라 주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업(遺業)이란 단어는 기업(基業)이란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유업'이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사업'을 뜻하지만 성경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 재산, 자산 대대로 물려주는 것' 등을 가리킨다. 18 절에서는 유업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신 복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는 것이다. 이 언약은 이삭에게 이어졌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셨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이 언약은 다시 야곱으로 이어졌다. 하나님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3-14). 이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그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율법과 무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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